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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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680년부터 681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는 6세기부터 동로마 제국에서 논쟁이 벌어진 단의론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가진 두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교리를 확립하고, 단의론과 이를 지지한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또한, 공의회는 단의론을 옹호했던 교황 호노리우스 1세를 비판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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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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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6세기부터 헤라클리우스(재위 610년-641년)와 콘스탄스 2세(재위 641년-668년) 황제 치세에 격화된 신학 논쟁, 특히 단일활동설과 단의론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었다.[3] 헤라클리우스는 단성론과의 논쟁을 해결하고자 온건한 신학적 입장을 제안했고, 그 결과 단일활동설과 단의론이 등장했다. 단일활동설은 그리스도가 두 개의 본성(신성과 인간성)을 가지지만 하나의 활동을 한다는 것이고, 단의론은 그리스도가 하나의 의지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는 대부분의 비잔틴 세계에서 받아들여졌으나, 예루살렘과 로마에서는 반대에 부딪혔다. 헤라클리우스 사후, 그의 손자 콘스탄스 2세는 논쟁이 제국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보고 논쟁을 중단시키려 했으나,[3] 교황 마르티노 1세와 수도사 고백자 막시무스는 단의론에 반대하여 649년 로마에서 시노드를 열어 단일활동설과 단의론을 비난했다.[4] 마르티노 1세는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으며, 그곳에서 곧 사망했다.[5]
이후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이미 상실하여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2. 1. 단의론 논쟁
단의설은 그리스도에게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두 가지 의지가 공존한다는 양의설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이는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로 제시되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잃었고, 더 이상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로 소집된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열렸다. 처음에는 300명 정도가 참가했으나, 최종적으로 공의회 교부로서 서명한 사람은 170명 정도였다.
공의회는 단의설을 부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단의설을 승인했던 전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까지 단죄했다. 이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가 자신의 잘못된 사상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를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 레오 2세는 회의 후 682년에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2. 1. 1. 단의론의 등장 배경
단의설은 그리스도에게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두 가지 의지가 공존한다는 양의설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이는 원래 정치적인 의도로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제시되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3]동로마 제국 황제 헤라클리우스(재위 610년-641년)는 페르시아에 빼앗긴 제국의 영토를 되찾고,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강력했던 단성론과의 논쟁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지지를 받는 온건한 신학적 입장을 제안했는데, 그 결과 단일활동설(그리스도는 두 개의 본성을 가지지만 하나의 활동을 가진다는 주장)과 단의론이 등장했다. 단의론은 그리스도가 하나의 의지를 가졌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와 신적 의지 사이에 반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3]
단의론은 대부분의 비잔틴 세계에서 받아들여졌으나, 예루살렘과 로마에서는 반대에 부딪혔다. 헤라클리우스 사후 그의 손자 콘스탄스 2세(재위 641년-668년)는 이 논쟁이 제국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보고, 논쟁을 중단시키려 했다.[3] 그러나 교황 마르티노 1세와 수도사 고백자 막시무스는 단의론을 비난하며 649년 로마에서 시노드를 열었다.[4]
2. 1. 2. 헤라클리우스와 콘스탄스 2세의 노력
헤라클리우스와 콘스탄스 2세 치세에 격화된 신학 논쟁은 6세기부터 시작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에 빼앗긴 제국의 영토를 되찾고,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강력했던 단성론과의 논쟁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온건한 신학적 입장을 제안했는데, 첫 번째는 단일활동설로 그리스도는 두 개의 본성(신성, 인간성)을 가지지만 하나의 활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단의론으로 그리스도는 하나의 의지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대부분의 비잔틴 세계에서 받아들여졌으나 예루살렘과 로마에서는 반대에 부딪혔고, 헤라클리우스 사후에도 논쟁은 계속되었다.[3]헤라클리우스의 손자 콘스탄스 2세는 이 논쟁이 제국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보고, 논쟁을 중단시키려 했다.[3] 그는 이 교리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교황 마르티노 1세와 수도사 고백자 막시무스는 단의론을 반대하며 649년 로마에서 시노드를 열어 단일활동설과 단의론을 비난했다.[4] 653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부 사람들이 교황이 혁명을 지지한다고 비난하여 마르티노는 체포, 재판, 유죄 판결 후 추방되어 사망했다. 마르티노와 막시무스의 입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5]
칼케돈 공의회의 양의설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에게 신의 의지만 있다고 주장하는 단의설은 본래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위한 정치적 의도로 제시되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2. 1. 3. 콘스탄스 2세의 칙령
헤라클리우스와 콘스탄스 2세 치세에 격화된 신학 논쟁을 해결하고자, 콘스탄스 2세는 이 논쟁이 제국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보고, 이 교리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논쟁을 중단시키려 했다.[3]2. 2. 이슬람의 발흥과 제국의 변화
الإسلامar의 발흥은 동로마 제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 영토를 상실하면서, 제국 내 종교적 갈등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2. 2. 1. 단성론 지역의 상실
단성론과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단의설은 칼케돈 공의회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이미 상실하여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2. 2. 2. 칼케돈 신앙의 중요성 증대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두 개의 의지가 공존한다는 양의설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만 있다고 주장하는 단의설은, 원래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제시된 사상이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미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잃었으며,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로 소집된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열렸다. 초기의 참가자는 300명 정도였으나, 최종적으로 공의회 교부로서 서명한 사람은 170명 정도였다.
공의회는 단의설을 부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단의설을 승인한 전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까지 단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것은, 자신의 잘못된 사상에 의한 것인지, 혹은 자신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를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이 사후에 이단 선고를 받을 수 있다는 이상 사태에 대해 로마 교황 레오 2세는 회의 후 682년에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3. 공의회 준비
콘스탄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콘스탄티누스 4세는 무슬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극복한 후, 로마와의 친교 회복을 위해 교황 도누스에게 서신을 보냈으나, 도누스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의 후임 교황 아가토는 황제의 제안에 동의하여 서방 전역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밀라노와 해트필드에서 시노드가 열렸고, 680년 부활절에는 로마에서 시노드가 소집되었다.[6]
아가토는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여 동방 측과 만나게 했다. 대표단은 교황의 편지 두 통을 가지고 출발했다.[7] 콘스탄티누스 4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게오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와 안티오키아의 마카리우스 1세 총대주교를 비롯한 동방 교회의 주교들을 소집했다.
당시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두 개의 의지가 공존한다는 양의설과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만 있다는 단의설이 대립하고 있었다. 단의설은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위해 제시된 사상이었으나, 칼케돈 공의회를 따르는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을 상실하여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3. 1. 콘스탄티누스 4세의 노력
콘스탄티누스 4세는 678년 무슬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극복한 후, 즉시 로마와의 친교 회복에 착수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회의를 제안하는 편지를 교황 도누스에게 보냈다. 편지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도누스는 사망했지만, 그의 후임인 교황 아가토는 황제의 제안에 동의하고 서방 전역에서 공의회를 열어 대표자들이 서방 교회의 전통을 제시하도록 명령했다. 680년 해트필드에서 열린 시노드는 타르수스의 테오도로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주재했다.[6] 교황 아가토는 680년 부활절에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했다.그 후 교황 아가토는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냈다.[6] 대표들은 교황 아가토가 황제에게 보낸 편지와 로마 시노드의 주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이렇게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출발했다.[7]
한편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게오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모든 주교를 공의회에 소집했다. 그는 또한 안티오키아의 마카리우스 1세 총대주교도 소환했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미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잃었으며,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로 소집된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열렸다. 초기의 참가자는 300명 정도였으나, 최종적으로 공의회 교부로서 서명한 사람은 170명 정도였다.
3. 2. 교황 아가토의 준비
콘스탄티누스 4세는 678년 무슬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극복한 후, 즉시 로마와의 친교 회복에 착수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회의를 제안하는 편지를 교황 도누스에게 보냈으나, 편지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도누스가 사망한 뒤였다. 그의 후임인 교황 아가토는 황제의 제안에 동의하고 서방 전역에서 공의회를 열어 대표자들이 서방 교회의 전통을 제시하도록 명령했다. 밀라노에서는 마우수에투스 대주교가 주재하는 시노드가 열렸고, 680년 해트필드에서는 타르수스의 테오도로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주재하는 또 다른 시노드가 열렸다. 교황 아가토는 680년 부활절에 로마에서 지역 시노드의 대표자들과 함께 시노드를 소집했다.[6]그 후 교황 아가토는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 동방 측과 만나도록 했다.[6] 대표단은 교황 아가토가 황제에게 보낸 편지와 로마 시노드의 주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이렇게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출발했다.[7]
3. 3. 대표단 파견
콘스탄티누스 4세는 678년 무슬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극복한 후, 즉시 로마와의 친교 회복에 착수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회의를 제안하는 편지를 교황 도누스에게 보냈다. 편지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도누스는 사망했지만, 그의 후임인 교황 아가토는 황제의 제안에 동의하고 서방 전역에서 공의회를 열어 대표자들이 서방 교회의 전통을 제시하도록 명령했다. 밀라노에서는 마우수에투스 대주교가 주재하는 시노드가 열렸고, 또 다른 시노드가 680년 해트필드에서 열렸으며, 이 공의회는 타르수스의 테오도로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주재했다. 교황 아가토는 그 후 680년 부활절에 지역 시노드의 대표자들과 함께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했다.그 후 교황 아가토는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방 측과 만나도록 보냈다.[6] 대표들은 교황 아가토가 황제에게 보낸 편지와 로마 시노드의 주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이렇게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출발했다.[7]
한편 콘스탄티누스 4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게오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와 그의 관할 구역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모든 주교를 공의회에 소집했다. 그는 또한 그의 관구에 대한 무슬림 점령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영구 거주하고 있는 비잔틴 임명자 안티오키아의 마카리우스 1세 총대주교도 소환했다.
3. 4. 동방 교회의 참여
콘스탄티누스 4세는 678년 무슬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극복한 후, 로마와의 친교 회복에 착수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회의를 제안하는 편지를 교황 도누스에게 보냈으나, 도누스는 사망한 상태였다. 그의 후임인 교황 아가토는 황제의 제안에 동의하고 서방 전역에서 공의회를 열어 대표자들이 서방 교회의 전통을 제시하도록 명령했다. 타르수스의 테오도로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680년 해트필드에서 시노드를 주재했다. 교황 아가토는 680년 부활절에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했다.[6]그는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 동방 측과 만나게 했다. 대표들은 교황 아가토가 황제에게 보낸 편지와 로마 시노드의 주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이렇게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출발했다.[7]
한편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게오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와 그의 관할 구역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모든 주교를 공의회에 소집했다. 그는 또한 안티오키아의 마카리우스 1세 총대주교도 소환했다.
4. 공의회 진행
680년 11월 7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의 돔형 홀인 트룰루스에서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공의회는 단의론 논쟁을 해결하고 칼케돈 공의회의 신학을 재확인하기 위해 개최되었다.[1]
공의회 기간 동안 교황 아가토의 서신이 낭독되었는데, 이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가진 두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교회의 전통적인 믿음을 명확히 했다. 참석한 대부분의 주교들은 이 서신을 받아들였고, 사도 베드로가 아가토를 통해 말하고 있다고 선언했다.[1]
공의회는 일원론과 단의론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 이단을 지지했던 교황 호노리우스 1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전 총대주교 4명을 단죄했다.[1] 안티오키아의 마카리우스 1세는 단의론을 옹호했지만, 정죄되고 폐위되었다. 공의회는 아가토의 서신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두 가지 에너지와 두 가지 의지를 가졌지만, 인간의 의지는 '그의 신적이고 전능한 의지에 복종한다'고 정의했다.[1]
공의회 진행 중, 한 단의론 사제가 자신의 믿음이 최고임을 증명하기 위해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시체를 가져왔지만, 시체에 속삭이듯 기도한 후에도 시체를 소생시키지 못했다.[1]
단의설은 원래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제시된 사상이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당시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잃었으며,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1]
공의회는 단의설을 부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단의설을 승인한 전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까지 단죄했다. 이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에 대한 논쟁은 호노리우스 논쟁으로 이어진다. 로마 교황 레오 2세는 682년에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4. 1. 참석자
680년 11월 7일, 37명의 주교와 여러 사제가 황궁 트룰루스에 소집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는 직접 참석했고,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는 비잔틴 제국의 대리인들이 대표했다. (이 시기에는 사라센 무슬림의 정복으로 인해 이 두 교구에는 총대주교가 없었다.) 교황과 그가 로마에서 개최했던 공의회는 몇몇 사제와 주교들이 대표했다.[1] 공의회는 개회에서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했다.[1] 황제는 처음 11번의 회의에 참석하여 주재하고 토론에 참여했으며, 681년 9월 16일 폐회에도 참석하여 151명의 주교가 함께했다.[1]4. 2. 황제의 역할
황제는 처음 11번의 회의에 참석하여 주재하고 토론에 참여했으며, 681년 9월 16일 폐회에도 참석하여 151명의 주교가 함께했다.[1]4. 3. 주요 안건 및 논의
680년 11월 7일,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의 돔형 홀인 트룰루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처음 11번의 회의는 황제가 직접 주재하고 토론에 참여했으며, 681년 9월 16일 폐회에도 참석했다. 초기에는 37명의 주교와 여러 사제가 참석했으나, 최종적으로는 151명의 주교가 서명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직접 참석했고,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사라센 무슬림의 정복으로 인해 총대주교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비잔틴 대리인들이 대표했다. 교황 아가토와 로마 공의회는 관례대로 사제와 주교들이 대표했다.공의회에서는 교황 아가토의 서신이 낭독되었는데, 이 서신은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가진 두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교회의 전통적인 믿음을 주장했다. 참석한 대부분의 주교들은 이 서신을 받아들여 사도 베드로가 아가토를 통해 말하고 있다고 선언했다.[1] 공의회는 아가토의 서신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두 가지 에너지와 두 가지 의지를 가졌지만, 인간의 의지는 '그의 신적이고 전능한 의지에 복종한다'고 정의했다.[1] 또한, 단의론을 옹호한 안티오키아의 마카리우스 1세는 정죄되고 폐위되었다.[1]
공의회는 일원론과 단의론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교황 호노리우스 1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전 총대주교 4명을 포함하여 이 이단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단죄했다.[1] 공의회가 끝난 후, 이 칙령은 로마로 보내져 교황 레오 2세의 승인을 받았다.[1] 레오 2세는 확인 서한에서 호노리우스 1세가 "사도적 전통의 가르침으로 이 사도 교회를 거룩하게 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불경스러운 배신으로 그 순수함을 더럽히도록 허용"했다고 비난했다.[1]
공의회 진행 중, 한 단의론 사제가 자신의 믿음이 최고임을 증명하기 위해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체를 가져왔지만, 시체에 속삭이듯 기도한 후에도 시체를 소생시키지 못했다.[1]
단의설은 그리스도에게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두 가지 의지가 공존한다는 양의설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이는 원래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위해 제시되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을 잃었기 때문에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단의설을 부정하면서 단의설을 승인한 전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까지 단죄했다. 이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 레오 2세는 682년에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4. 4. 단의론 정죄
680년 11월 7일, 37명의 주교와 여러 사제가 황궁 트룰루스에 소집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가 직접 참석했고,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는 비잔틴의 대리인들이 대표했다. 교황과 그가 로마에서 개최했던 공의회는 몇몇 사제와 주교들이 대표했다. 황제는 처음 11번의 회의에 참석하여 주재하고 토론에 참여했으며, 681년 9월 16일 폐회에도 참석하여 151명의 주교가 함께했다.공의회 기간 동안 교황 아가토의 서신이 낭독되었는데, 이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가진 두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교회의 전통적인 믿음을 주장했다. 참석한 대부분의 주교들은 이 서신을 받아들였고, 사도 베드로가 아가토를 통해 말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공의회는 일원론과 단의론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교황 호노리우스 1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전 총대주교 4명을 포함하여 이 이단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포함시켰다. 안티오키아의 마카리우스 1세는 단의론을 옹호했지만, 그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정죄되고 폐위되었다. 공의회는 아가토의 서신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두 가지 에너지와 두 가지 의지를 가졌지만, 인간의 의지는 '그의 신적이고 전능한 의지에 복종한다'고 정의했다.
공의회가 끝나자, 이 칙령은 로마로 보내졌고, 아가토의 후임자인 교황 레오 2세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레오는 공의회 확인 서한에서 "사도적 전통의 가르침으로 이 사도 교회를 거룩하게 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불경스러운 배신으로 그 순수함을 더럽히도록 허용한 호노리우스"를 비난했다.
공의회 진행 중 어느 시점에서, 한 단의론 사제가 자신이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믿음이 최고임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시체를 가져왔지만, 시체에 속삭이듯 기도한 후에도 시체를 소생시키지 못했다.
단의설은 원래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제시된 사상이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미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잃었으며,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로 소집된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열렸다. 초기의 참가자는 300명 정도였으나, 최종적으로 공의회 교부로서 서명한 사람은 170명 정도였다. 공의회는 단의설을 부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단의설을 승인한 전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까지 단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를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 레오 2세는 회의 후 682년에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4. 5. 호노리우스 1세 문제
680년 11월 7일부터 681년 9월 16일까지 열린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단의론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 이단을 지지했던 교황 호노리우스 1세를 포함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전 총대주교 4명을 단죄했다.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두 가지 에너지와 두 가지 의지를 가졌지만, 인간의 의지는 '그의 신적이고 전능한 의지에 복종한다'고 정의했다.이 과정에서 단의설을 승인한 호노리우스 1세가 단죄되면서, 그 이유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오 2세는 682년에 호노리우스 1세가 단죄된 이유는 그가 이단적인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4. 5. 1. 호노리우스 논쟁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단의설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과거 단의설을 옹호한 교황 호노리우스 1세를 단죄했다. 이로 인해 호노리우스 1세가 단죄된 이유가 그의 개인적인 신념 때문인지, 아니면 이단에 대한 미흡한 대처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교황 레오 2세는 682년에 호노리우스 1세가 단죄된 이유는 그가 이단적인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는 교황이 사후에 이단으로 선고받을 수 있다는 이례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이었다.
4. 5. 2. 레오 2세의 해석
레오 2세는 공의회 확인 서한에서 "사도적 전통의 가르침으로 이 사도 교회를 거룩하게 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불경스러운 배신으로 그 순수함을 더럽히도록 허용한 호노리우스"를 비난했다. 레오 2세는 682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에 대해, 호노리우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5. 공의회 결과 및 영향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단의설을 부정하고, 이 과정에서 단의설을 승인했던 전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까지 단죄하였다. 이후 호노리우스 1세가 단죄된 이유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호노리우스 논쟁으로 이어진다. 로마 교황 레오 2세는 682년에 호노리우스 1세가 단죄된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1]
5. 1. 정통 교리 확립
그리스도는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두 가지 의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양의설은 부정되었고, 그리스도는 신의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는 단의설 또한 원래 정치적인 의도로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위해 제시되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이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미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잃었고, 더 이상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소집된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열렸다. 초기 참가자는 300명 정도였으나, 최종적으로 공의회 교부로서 서명한 사람은 170명 정도였다.
공의회는 단의설을 부정하였고, 그 과정에서 단의설을 승인했던 전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까지 단죄하기에 이르렀다.[1] 이후 호노리우스 1세가 단죄된 이유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그가 잘못된 사상을 가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 논쟁을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이 사후에 이단으로 선고받을 수 있다는 이례적인 상황에 대해 로마 교황 레오 2세는 682년 회의 후 호노리우스 1세가 단죄된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1]
5. 2. 단의론자 처벌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두 개의 의지가 공존한다는 양의설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만 있다고 주장하는 단의설은, 원래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제시된 사상이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미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잃었으며,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로 소집된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열렸다. 초기의 참가자는 300명 정도였으나, 최종적으로 공의회 교부로서 서명한 사람은 170명 정도였다.
공의회는 단의설을 부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단의설을 승인한 전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까지 단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것은, 자신의 잘못된 사상에 의한 것인지, 혹은 자신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를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이 사후에 이단 선고를 받을 수 있다는 이상 사태에 대해 로마 교황 레오 2세는 회의 후 682년에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5. 3. 교황권 논쟁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두 개의 의지가 공존한다는 양의설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만 있다고 주장하는 단의설은, 원래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제시된 사상이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미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잃었으며,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로 소집된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열렸다. 초기의 참가자는 300명 정도였으나, 최종적으로 공의회 교부로서 서명한 사람은 170명 정도였다.
공의회는 단의설을 부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단의설을 승인한 전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까지 단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것은, 자신의 잘못된 사상에 의한 것인지, 혹은 자신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를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이 사후에 이단 선고를 받을 수 있다는 이상 사태에 대해 로마 교황 레오 2세는 회의 후 682년에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5. 4. 비잔틴 제국의 안정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두 개의 의지가 공존한다는 양의설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에게는 신의 의지만 있다고 주장하는 단의설은, 원래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단성론주의자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제시된 사상이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미 이슬람 군의 침공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단성론이 지배적이었던 시리아, 이집트 등의 영토를 잃었으며, 단성론을 배려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로 소집된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열렸다. 초기의 참가자는 300명 정도였으나, 최종적으로 공의회 교부로서 서명한 사람은 170명 정도였다.
공의회는 단의설을 부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단의설을 승인한 전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까지 단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것은, 자신의 잘못된 사상에 의한 것인지, 혹은 자신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를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이 사후에 이단 선고를 받을 수 있다는 이상 사태에 대해 로마 교황 레오 2세는 회의 후 682년에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대처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참조
[1]
서적
Continuity and Change in Creed and Confessions
Yale University Press
[2]
서적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Rutgers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Acts of the Council of Chalcedon
Liverpool University Press
[4]
서적
Saints and Feasts of the Liturgical Year
Georgetown University Press
[5]
서적
Byzantine Rome and the Greek Popes: Eastern influences on Rome and the papacy from Gregory the Great to Zacharias, A.D. 590–752.
Lexington Books
[6]
웹사이트
Popes Through the Ages
http://www.cfpeople.[...]
2006-02-06
[7]
서적
A History of the Councils of the Church
https://books.google[...]
T. & T. Clark
[8]
서적
The Condemnation of Pope Honorius
https://archive.org/[...]
Catholic Truth Society
[9]
서적
The Ecumenical Councils of the Catholic Church: A History
Liturg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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